포스테키안

2024 181호 / POSTECH ESSAY

2024-04-30 455

배움의 길, 성장의 길
 

 

포스텍 학생홍보봉사단체로 활동하고 계시는 학생들로부터 어려운 글을 한 편 청탁 받았습니다. 포스텍 입학을 희망하는 전국 팔도의 고교생, 포스텍의 여러 구성원, 더 나아가 일반 독자까지도 염두에 두고 학문에 대한 견해를 소개하는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독자들께 고르게 가 닿을 수 있는 글을 쓰는 어려움은 차치하고서라도, 평소 학술 활동에 대해 무슨 대단한 철학을 벼렸을 리 만무한 저 같은 범속한 연구자에게는 ‘학문에 대한 견해’라는 주제 자체가 상당히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십수 년째 ‘학계’라는 곳에 몸담고 있고, 몇 해 전부터는 포스텍 학생들의 배움을 돕는 선생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참에 공부하며 성장하는 삶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도 뜻이 있는 일이겠거니 싶었습니다. 고민의 결과를 다음 세 가지 키워드에 담아 공유합니다.

 

 

첫 번째 키워드는 ‘우연’입니다.
제 학문의 역정을 되돌아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연히’ 주어진 계기에 이끌려 ‘우연히’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인도되었던 경험이 많았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제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막연한 마음에 눈에 보이는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축학을 전공으로 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뜻을 간간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는 정확히 누구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어느 친구가 왜 눈에 보이는 것만 만들려고 하냐고 물었습니다. 우연히 들었던 그 질문이 그날 이후 제게 하나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다시 말해 어떠한 생각과 관점을 새로이 만드는 일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나름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건축학 대신에 인문학을, 그중에서도 역사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역사학도로서 공부를 이어나가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순간마다 저는 우연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석사과정 때는 사회경제사라는 분야를 주로 공부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도 그러하듯, 역사 속 인물들에게도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농업, 먹거리, 환경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우연히’ 농약, 화학비료, 트랙터, 품종개량 종자 같은 과학 기술적 요소가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렇게 박사과정 때는 전공을 과학사로 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쩌다 늦은 나이에 이역만리異域萬里(다른 나라의 아주 먼 곳)에서 외국인 학부생들과 일반생명과학이나 유전학 개론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크고 작은 우연의 연쇄를 거듭하다가 전혀 인연이 없을 것만 같았던 포스텍에 부임해 과학사를 가르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진로’라는 것은 적어도 저한테는 ‘상담’이나 ‘설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우연의 바다 위를 항해하는 느낌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출발지, 경로, 도착지를 모두 인지하고 결정한 상태에서 나아가는 길, 진로進路도 물론 훌륭합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출발지, 경로, 경유지, 도착지를 잘 알지 못한 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채, 그저 나아감 자체를 감당하며, 우연히 진로상에 추가된 변수나 선택지를 놓고 임기응변하며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연은 무지, 낯섦, 불안을 주기도 하지만, ‘지금까지의 나’라는 관성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도약을 가능케 하기도 합니다. 매번 우연을 과신하는 도박을 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우연에 지나치게 개방적이지 못한 태도를 취할 경우, 우리의 정신과 삶은 예측 가능한 범위 너머로 뻗어나가기 어려워지고 말 것입니다.

 

중국 현지연구 / 하버드 대학교 박사과정 시절

 

배우며 성장하는 삶에 관한 제 두 번째 키워드는 ‘감당’입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인생에 배움은 끝이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 글의 독자 중 다수는 10대나 20대라고 전제할 때, 여러분이 현재 살고 계시는 삶의 단계는 특히나 ‘배움’과 ‘깨우침’이 주가 되는 시절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대부분은 ‘대학’이라는 공간을 곧 경험하게 되시거나 이미 경험하는 중이실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대학大學에서의 ‘큰 공부’는 여러분들이 배우고 깨우쳐 자신의 전문성을 끌어올리고 동시에 생각과 마음의 폭을 넓히게끔 도움을 제공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큰 공부’에는 남이 대신해 줄 수도 없고 그저 요행을 바랄 수도 없는, 온전히 자기가 책임지고 짊어져야 하는 부분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부모님, 담임선생님, 과외 선생님, 학원 선생님, 교수님, 심지어 ChatGPT까지, 우리 주변에 훌륭한 공부 도우미가 아무리 많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때에, 해야 할 것을, 버겁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직면하여,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어떻게든 해내고, 그로부터 오는 결과에 보람을 느끼거나 자존감을 굳게 세우고, 혹 그 결과에 아쉬움이 있더라도 당당하게 책임을 지고 그다음 도전을 이어가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고 또 소중합니다. 배움과 성장에 관한 한 ‘감당’의 과정이 멋들어진 결과보다 훨씬 더 본질적일 수 있습니다.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여 높은 결과를 받은 학생을 두고, 학기 말 과제를 생성형 인공지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그럴듯하게 작성해 A+ 학점을 받은 학생을 두고, 긍정적인 배움과 성장의 경험이 존재했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른 연구자의 업적을 표절하거나 정당하게 활용하지 않은 채 단기간 안에 다량의 연구 성과를 거두는 연구자를 두고 학문을 논할 수 없습니다. 시험에서의 고득점, 높은 학점, 빠르고 많은 연구 성과라는 ‘결과’에만 집착한 나머지 감당의 ‘과정’을 살아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초조하고 비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히 내 몫을 감당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떳떳함과 명예로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함께한 화학과 22학번 김유빈 알리미와 컴퓨터공학과 22학번 박기현 알리미

 

마지막 세 번째 키워드는 ‘명실상부名實相符’입니다.
여기서 ‘명(명목)’은 타이틀, 학력, 직업, 직위, 자격증, 시험 점수 같은 것들입니다. 즉각적이고 비교 가능합니다. 반면, ‘실(실제)’은 덜 직관적이고 대체로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실력, 전문성, 인품, 경륜, 깊이 같은 말로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명’의 무한 상승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일원화되고 수치화되고 등급화된 ‘명’의 사다리 위에 모든 사람을 밀어 넣고 오로지 서로 위냐 아래냐를 따지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도 같습니다. 사실 진정으로 성장하는 삶에는 이러한 ‘명’의 ‘상승’과 더불어 반드시 ‘실’의 ‘성숙’도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명’만을 좇기보다는 ‘명’과 ‘실’을 모두 가꾸며 살고자 할 때, 더 온전한 자기완성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반대로 ‘명’의 투쟁에 지쳐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실’의 세계 안으로 마냥 가라앉아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명’으로 번역되지 못한 ‘실’은 타인이 알기 쉽지 않습니다. ‘실’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 경우, 다른 사람들이, 세상이 나의 능력과 가치를 몰라준다는 원통함에 빠지기 쉽습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과 제가 배움과 성장을 거듭하며 ‘명’과 ‘실’을 서로 완전히 일치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양자를 서로 최대한 부합하게 챙겨갈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정신의 구김이 없고 자신과 타인에게 너그러운 ‘학인學人’의 삶을 힘닿는 데까지 살아나갈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이종식 교수